신용등급 12년만의 강등…미국채 '무위험자산' 지위 약해지나
피치, 정치갈등·재정적자 확대에 부채상환력 의심 시작
국가부도 내건 도넘는 정쟁 등 '거버넌스 악화' 지적
미 정부 "자의적" 반발…일부 학자도 '뭐가 변했나' 의문
(뉴욕=연합뉴스) 이지헌 특파원 =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1일(현지시간)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 '로 강등한 데는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와 재정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극한 대립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재정을 써야 할 곳은 증가하는데 늘어난 나랏빚 탓에 이자 부담까지 커지면서 미국 정부의 부채상환 능력에 자연스럽게 의심의 시선이 향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회의 거버넌스(통치체제)가 벼랑 끝 대립을 일삼는 민주, 공화 양당 구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점은 신뢰도 하락을 가속화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피치는 결국 미국 국채를 기계적으로 '무위험 자산'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 美의회 부채한도 협상 때마다 '국가부도' 직전에 합의
피치는 이날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배경을 설명하는 보고서에서 '거버넌스 악화'를 첫 번째 사유로 제시했다.
이는 피치가 앞서 지난 5월 미국을 '부정적 관찰대상'으로 지정하면서 내건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피치는 부채한도 상향 협상 대치를 두고 "디폴트(채무불이행) 예상일이 빠르게 다가오는데도 부채한도 상향·유예 등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을 막는 정치적 당파성이 커지는 것을 반영한다"라고 밝혔다.
불필요한 국가부도 사태 위험을 내걸고 '벼랑 끝 대치' 전술을 반복하는 정치권 행태를 보며 신용등급을 깎을 수 있다고 사전에 경고 메시지를 준 것이다.
피치는 이어 지난 6월 부정적 관찰대상 지위를 유지하며 "부채한도를 둘러싼 반복적인 정치적 교착 상태와 디폴트 예상일 직전까지의 지연은 재정과 부채 문제와 관련한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라고 지적했다.
앞서 2011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 로 내릴 때도 국가부채 상한 증액에 대한 정치권 협상 난항 등이 주된 사유로 지목된 바 있다.
◇ 근본 원인은 재정적자…미 의회예산국도 증가에 경고
신용등급 하락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확대가 꼽힌다. 세수보다 재정지출이 더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피치도 이번 보고서에서 강등 요인으로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긴 분량을 할애했다.
경기 요인으로 연방정부의 세수는 약화했는데 각종 재정지출은 늘고 있는 점이 재정적자 확대 요인으로 꼽혔다.
작년 하반기 이후 국방 관련 지출이 늘어난 데다 올해 하반기부턴 인프라 투자 관련 각종 재정지출 계획이 대기 중인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이자 비용 증가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나랏빚을 크게 늘린 상황에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올려 이자 상환 부담이 이중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피치 분석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미 재정적자 비중은 2022년 3.7%에서 올해 6.3%, 2024년 6.6%, 2025년 6.9%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에 대한 경고는 미국의회예산국(CBO)에서도 나온 바 있다.
CBO는 지난달 낸 장기 예산 전망 보고서에서 2053년 미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중이 10.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CBO는 특히 이자 비용 상승이 재정적자를 키울 것으로 전망했다.
◇ 점점 늙어가는 인구…불가피한 재정지출 확대도 부담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재정 악화 우려도 이번 등급 강등에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피치는 이날 보고서에서 CBO 분석 결과를 인용, 2033년까지 메디케어(고령자 의료보험)와 사회보장 지출이 GDP의 1.5%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피치는 "향후 10년간 금리 상승과 부채 증가로 인해 이자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으로 재정개혁이 없는 한 고령층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미국은 2021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6.8%로 초고령사회에 다가서고 있다.
피치는 나아가 정부 정책 결정의 일관성과 신뢰성 저하로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약화할 경우 정부의 자금조달 유연성이 감소해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할 유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정개혁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거버넌스 악화 경향을 반전시킬 경우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할 요인이 된다고 피치는 평가했다.
◇ 미 정부 "자의적" 반발…일부 학계도 등급강등에 '갸우뚱'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이날 피치 결정에 대해 "자의적이며 오래된 데이터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미국 국채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유동자산이며 미국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며 "피치의 결정은 미국인, 투자자 그리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강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 주요 경제권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회복세를 이끌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는 피치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일부 학계에서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교수는 피치가 일관성을 잃었다고 강등사유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는 피치가 지난해 신용등급 하향 조건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의 급격한 증가, 거버넌스의 질 악화, 거시 경제 정책과 전망 등을 내걸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부채비율 급증은 일어나지 않았고 거버넌스 부문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거시경제도 작년보다 크게 개선됐다"며 현 상황이 강등조건과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pan@yna.co.kr
(끝)
피치, 정치갈등·재정적자 확대에 부채상환력 의심 시작
국가부도 내건 도넘는 정쟁 등 '거버넌스 악화' 지적
미 정부 "자의적" 반발…일부 학자도 '뭐가 변했나' 의문
(뉴욕=연합뉴스) 이지헌 특파원 =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1일(현지시간)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 '로 강등한 데는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와 재정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극한 대립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재정을 써야 할 곳은 증가하는데 늘어난 나랏빚 탓에 이자 부담까지 커지면서 미국 정부의 부채상환 능력에 자연스럽게 의심의 시선이 향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회의 거버넌스(통치체제)가 벼랑 끝 대립을 일삼는 민주, 공화 양당 구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점은 신뢰도 하락을 가속화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피치는 결국 미국 국채를 기계적으로 '무위험 자산'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 美의회 부채한도 협상 때마다 '국가부도' 직전에 합의
피치는 이날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배경을 설명하는 보고서에서 '거버넌스 악화'를 첫 번째 사유로 제시했다.
이는 피치가 앞서 지난 5월 미국을 '부정적 관찰대상'으로 지정하면서 내건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피치는 부채한도 상향 협상 대치를 두고 "디폴트(채무불이행) 예상일이 빠르게 다가오는데도 부채한도 상향·유예 등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을 막는 정치적 당파성이 커지는 것을 반영한다"라고 밝혔다.
불필요한 국가부도 사태 위험을 내걸고 '벼랑 끝 대치' 전술을 반복하는 정치권 행태를 보며 신용등급을 깎을 수 있다고 사전에 경고 메시지를 준 것이다.
앞서 2011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 로 내릴 때도 국가부채 상한 증액에 대한 정치권 협상 난항 등이 주된 사유로 지목된 바 있다.
◇ 근본 원인은 재정적자…미 의회예산국도 증가에 경고
신용등급 하락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확대가 꼽힌다. 세수보다 재정지출이 더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피치도 이번 보고서에서 강등 요인으로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긴 분량을 할애했다.
경기 요인으로 연방정부의 세수는 약화했는데 각종 재정지출은 늘고 있는 점이 재정적자 확대 요인으로 꼽혔다.
작년 하반기 이후 국방 관련 지출이 늘어난 데다 올해 하반기부턴 인프라 투자 관련 각종 재정지출 계획이 대기 중인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이자 비용 증가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나랏빚을 크게 늘린 상황에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올려 이자 상환 부담이 이중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피치 분석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미 재정적자 비중은 2022년 3.7%에서 올해 6.3%, 2024년 6.6%, 2025년 6.9%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에 대한 경고는 미국의회예산국(CBO)에서도 나온 바 있다.
CBO는 지난달 낸 장기 예산 전망 보고서에서 2053년 미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중이 10.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CBO는 특히 이자 비용 상승이 재정적자를 키울 것으로 전망했다.
◇ 점점 늙어가는 인구…불가피한 재정지출 확대도 부담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재정 악화 우려도 이번 등급 강등에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피치는 "향후 10년간 금리 상승과 부채 증가로 인해 이자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으로 재정개혁이 없는 한 고령층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미국은 2021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6.8%로 초고령사회에 다가서고 있다.
피치는 나아가 정부 정책 결정의 일관성과 신뢰성 저하로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약화할 경우 정부의 자금조달 유연성이 감소해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할 유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정개혁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거버넌스 악화 경향을 반전시킬 경우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할 요인이 된다고 피치는 평가했다.
◇ 미 정부 "자의적" 반발…일부 학계도 등급강등에 '갸우뚱'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이날 피치 결정에 대해 "자의적이며 오래된 데이터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미국 국채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유동자산이며 미국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며 "피치의 결정은 미국인, 투자자 그리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강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 주요 경제권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회복세를 이끌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는 피치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일부 학계에서도 피치의 이번 결정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교수는 피치가 일관성을 잃었다고 강등사유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는 피치가 지난해 신용등급 하향 조건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의 급격한 증가, 거버넌스의 질 악화, 거시 경제 정책과 전망 등을 내걸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부채비율 급증은 일어나지 않았고 거버넌스 부문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거시경제도 작년보다 크게 개선됐다"며 현 상황이 강등조건과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p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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