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현장을가다] ⑬차 아닌 사람위한 길 내니 상가 '북적'
작성일 2023-08-12 10:04:32 | 조회 68
[도시재생 현장을가다] ⑬차 아닌 사람위한 길 내니 상가 '북적'
전주시 전통문화거리 조성사업…골목골목을 걷기 편한 보행길로 개선
이동성·접근성 강화되며 '한옥마을 관광객' 대거 유입돼 상권 활성화
카페와 음식점 연평균 119개 창업…대형 숙박시설도 5개 들어서

[※ 편집자 주 = 현대 도시의 이면 곳곳에는 쇠퇴로 인한 도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신도시 개발, 기존 시설의 노후화가 맞물리면서 쇠퇴는 더욱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날로 늘어가는 쇠퇴 도시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주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도시 경쟁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도시의 재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연합뉴스는 모범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찾아 소개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전주=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중앙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나라의 여느 도시나 그렇듯 전북 전주시 중앙동도 오랜 기간 전주의 중심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북과 전남, 제주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이 있었고 근대 이후에는 권력의 상징인 전북도청과 전북경찰청이 있었다. 도로 하나를 건너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관광명소 한옥마을이 있다. 그러나 전주 중앙동도 원도심의 쇠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도심이 노후화하는 데다 신도시 개발까지 이어지며 인구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2005년 도청과 경찰청의 이전은 직격탄이 됐다. 이렇다 할 문화 자산이나 잘 발달한 상권마저 없다 보니 한옥마을의 '낙수효과'도 전혀 누릴 수 없었다. 특히 옛 도청 인근은 밤이 되면 돌아다니기 무서울 정도로 인적이 끊긴 유령도시가 됐다.

◇ 전라감영 복원 계기로 대대적인 보행로 개선 착수
20년 가까이 침체일로를 걷던 이곳에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옛 도청 터에 전라감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다. 전라감영은 1만6천㎡ 부지에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과 내아, 내아 행랑 등 7동의 핵심 건물이 원형을 살려 복원됐다. 한옥마을의 외연을 넓힐 또 다른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전주시가 그즈음 시작한 '전통문화 중심 도시재생사업'은 전라감영을 축으로 해, 죽어가는 골목을 살리려는 시도였다. 한옥마을 관광객의 동선을 확대해 도시를 활성화하는 효과도 기대했다. 사업의 핵심은 길이었다. 누구나 편하게 걸으며 전라도 천년의 중심인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보행자 중심의 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보행로 확대는 영국을 비롯한 도시재생 선진국들이 가장 중점을 두는 분야이기도 하다.


복원된 전라감영 앞 도로인 전라감영로 500m 구간이 첫 대상이었다. 애초 인도 자체가 없었던 왕복 3∼4차로의 도로였다. 전주시는 도로를 왕복 2∼3차로로 줄이고 대신에 보행자를 위해 차도 양방향에 인도를 만들었다. 인도들의 폭도 2m가량으로 넓게 잡고 삭막했던 거리 곳곳에는 나무들을 넉넉히 심었다. 밤에도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도록 야간 조명을 확대하고 지저분한 전신주와 전선을 제거하는 지중화 작업을 통해 조망권을 확보했다.

◇ 차로 줄여 인도 내고 화단·쉼터 내 '걷는 즐거움' 선사
보행자 안전을 위해 바닥을 거친 마감재로 재포장해 차량 속도를 줄이는 세심함도 보였다. 도로 곳곳에 볼라드(차량 진입 방지용 말뚝)와 가로화단, 소규모 쉼터를 만들어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걷는 재미, 쉬는 재미를 더했다. 보행자 중심의 거리는 천년 역사의 도시라는 이 일대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사람을 위한 길을 내자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상권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버려진 상가가 하나둘 음식점과 카페로 되살아나고 땅값도 배 가까이 뛰며 3.3㎡당 1천만원 안팎을 호가하고 있다.
상인 손숙자씨는 "그전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도 없고, 밤이면 어둡기까지 해서 장사가 전혀 되질 않았다"면서 "걷기 좋은 인도가 만들어지고 밤길이 환해지면서 이제는 관광객이 제법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는 최희숙(67)씨도 "그전에는 밤이 되면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면서 "관광객들이 길이 예쁘다며 좋아하고, 실제 유동 인구가 많이 늘었다"고 거들었다.


인근의 객리단길도 보행로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객리단길은 전주의 대표적 원도심 골목길로,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주택지역이다. 상권도 보잘것없었고 그래서 임대료도 매우 낮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자본이 없는 젊은이들이 찾아들어 와 허름한 주택을 카페와 음식점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젊은 감성을 살린 분위기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골목골목에 활기가 돌았다.

◇ 양방향 도로를 일방으로 바꿔 보행 공간·안전 확보
그 가능성에 주목한 전주시는 차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핵심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모든 도로를 보행자가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인도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전주시는 양방향 차선을 일방통행으로 바꿔 보행 공간을 확대하고 보행자의 안전을 확보했다. 주말이면 아예 도로를 통째로 막고 각종 축제를 열기도 한다. 전면적인 지중화 작업을 통해 지저분한 골목도 깨끗하게 정비했다. 이제 객리단길은 밤이면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전주시의 대표적인 골목상권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곳에서 3년째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이도희(28)씨는 "예전에는 길이 좁고 어두워 아는 사람이 아니면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면서 "보행로가 정비되고 일방통행으로 바뀌면서 주말 저녁이면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페를 열고 있는 고운빛(29)씨는 "사람을 위한 길로 바뀌면서 운전자들은 일부 불편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걷기 좋고 운치도 있다는 손님들이 더 많다"며 "골목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전주시가 최근 주목하는 길은 고물자골목이다. 고물자골목은 조선시대 은방골목이 형성됐던 옛길로, 해방 이후 구호물자가 거래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시는 270m 길이의 골목 환경을 정비하고 전통공예와 관련된 소규모 갤러리, 공방을 하나둘 입주시키고 있다. 청년 공유공간인 '둥근숲'도 건립했다. 둥근숲은 공유 주방과 다목적홀, 공방 공동작업장을 갖춘 청년들의 거점 공간이다. 둥근숲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는 만큼 고물자골목은 머지않아 청년들의 새로운 아지트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 폐업 잇따랐던 골목에 활기…인근 도로로 확대
'걷고 싶은 거리'는 이 밖에도 인근의 동문길, 충경로로 계속 확대되고 있다. 총길이만 4∼5㎞가 넘는다. 특히 이들 길은 제각각의 스토리를 가지고, 끊이지 않은 채 하나로 이어지면서 전주의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 중심의 이들 길은 한옥마을에 집중된 관광객의 동선을 넓히는 효과를 톡톡히 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이들 길을 따라 풍남문, 전라감영, 풍패지관으로 유입되며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실제 전주시 분석 결과 이들 사업지구에는 관광객과 시민을 상대로 하는 카페와 음식점 등이 연평균 119개씩 창업하고 있다. 최근 3년여간 코로나19로 소상공인의 폐업이 잇따랐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창업 열기다. 이 일대에 들어선 호텔급 숙박시설도 5개에 투자액만 1천788억원에 달한다. 대형 숙박시설의 잇따른 건립은 체류형 관광객의 유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역에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다.
한옥마을 관광객의 증가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주변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면 기대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200억원 안팎의 비교적 적은 사업 예산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점도 의미를 더해준다.
소영식 전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차를 위한 도로를 사람을 배려한 길로 바꿨을 뿐인데 참으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인도를 만들어 이동성과 접근성을 확대해주는 것은 골목상권 활성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doin1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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