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그려낸 멸종위기 동물…"함께 쓰고 부르며 기억해요"
작성일 2023-10-09 12:32:09 | 조회 25
한글로 그려낸 멸종위기 동물…"함께 쓰고 부르며 기억해요"
반달가슴곰 시작으로 '한글 동물 작가' 된 진관우 숨탄것들 대표
올해 '우리말 사랑꾼'으로 뽑혀…"기록하면 영원으로 만들 수 있어"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가장 큰 동물이지만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반달가슴곰을 널리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20년 12월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 진관우 씨는 생각에 잠겼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을 활용한 교구 디자인을 고민하던 때였다.
반달가슴곰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문득 귀 모양이 한글 자음 'ㅂ' 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가는대로 '반달가슴곰' 다섯 글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자 어느덧 곰이 완성됐다.
한글로 멸종 위험에 처한 동물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한글 동물 작가'의 시작이었다.

진관우(23) '숨탄것들' 대표는 9일 연합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가 쓰는 한글 이름으로 사라져가는 동물과 생물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끄는 숨탄것들은 한글을 아끼고 생물을 사랑하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일컫는 우리말 '숨탄것'에서 비롯된 작업으로, 진 대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온통 그 동물의 이름으로 채운 작품을 선보여왔다.
반달가슴곰을 시작으로 따오기, 독도 강치, 하마, 황제펭귄 등 지금까지 내놓은 작품만 400점이 넘는다.
진 대표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기록하면 기억할 수 있고, 기록하면 찰나를 영원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줘야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글은 말의 뜻을 구별해 주는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인 음운(音韻)이 있는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단어가 유추가 안 된다. 생태계에서 어느 종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화가' 또는 '작가'로 불리지만, 그의 작품은 예술적 영감보다는 공부에 더 가깝다.
최근 화제가 되거나 드라마·영화 등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동물이 있는지 살펴보고 자료를 찾는다. 각 동물의 모습은 물론, 행동적인 특징이나 생태적 환경까지 고려하기 위해서다.
그는 "처음에는 컴퓨터 마우스로 그리다 보니 2시간씩 걸렸다. 군대에서도 계속 작업하고 싶어서 휴대전화를 조금 큰 기종으로 바꿨는데 틈틈이 200점 가까이 그리고 나왔다"며 웃었다.

진 대표는 '꼭 이것만은 봤으면 좋겠다'고 할 만한 작품 하나를 골라달라는 말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을 표현한 작품을 골랐다.
그는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보고 수염부터 곤룡포 안 용무늬까지 하나하나 그렸다. 전시를 위해 출력한 작품 크기가 가로 1m, 세로 1.5m인데 완성하는데 한 달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이 작품을 소개할 때는 한글을 만든 분을 다시 한글로 만들어 드렸다고 소개하기도 해요." (웃음)
전시,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온 진 대표는 올해 한글날을 맞아 한글문화연대가 뽑은 '우리말 사랑꾼'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작품은 한글의 과학적이고 예술적 원리를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그는 "갑자기 연락받아 얼떨떨하다"면서도 "앞으로 일상에서도 한글을 제대로, 잘 쓸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진 대표는 숨탄것들 프로젝트를 다양한 분야로 넓히고 싶다는 포부도 전했다.
그동안 작업한 '한글 동물' 작품은 올해 11월쯤 그림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지구의 숨결을 주제로 한 책은 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멸종 위기종을 다룬다.
"기회가 된다면 해외에서도 한글 동물을 다루고 싶어요.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면서 생물 다양성을 함께 고민하는 것도 그중 하나고요. 사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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