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맑은 계류 속을 첨벙첨벙…아침가리 계곡 트레킹
작성일 2023-08-11 09:36:36 | 조회 40
[걷고 싶은 길] 맑은 계류 속을 첨벙첨벙…아침가리 계곡 트레킹

(인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떨어지는 빗방울이 맑은 계류의 수면 위로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협곡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줄기는 운무에 가려 있었다.



◇ 계곡 물길을 걷는 청량함과 해방감

강원도 인제군 방태산(해발 1,435m) 아침가리 계곡에서 여름 한 철에만 맛볼 수 있는 계곡 트레킹을 우중에 시도해 보았다. 계곡 트레킹이란 계곡 옆 육로뿐만 아니라 계류 속을 걸어 다니는 것을 이른다. 계곡 따라 난 오솔길을 걷다가 마음 내키면 신발과 옷이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물속을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계곡 건너편으로 갔다. 오솔길을 걷다가 수심이 얕은 곳을 만나면 다시 물길을 걷거나 계곡을 건넜다. 계류를 12번쯤 건넜을까.
계곡 옆길과 물길을 걸으며 느낀 것은 더위를 떨쳐버리는 시원함과 가슴이 탁 트이는 해방감이었다.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물길도 걸을 수 있다는 생경함은 자연을 새 눈으로 보게 했다. 적당한 물놀이 공간도 만났다.
며칠째 장마가 이어졌지만, 물이 크게 불어나지는 않아 계곡 트레킹이 통제되지 않았다. 벌써 몇 팀이 일찌감치 계곡을 따라 앞서 내려갔단다. 계곡 트레킹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 만한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계곡 트레킹이 '걷기의 별미'라면 우중의 계곡 트레킹은 '별미 중의 별미'일 것이다. 비에 젖은 원시 숲은 선경과 다르지 않았고, 살갗을 적시는 가랑비는 감미로웠다.



산지가 넓은 한국은 골짜기가 많지만, 계곡 트레킹을 할 만한 곳은 흔치 않다. 대개 계곡 지형이 험해 물살이 세거나 수심이 깊기 때문이다. 아침가리 계곡도 상류는 거칠지만 중·하류는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깊지 않다. 최고의 계곡 트레킹 코스로 꼽히는 곳이 아침가리 계곡 중·하류이다. 계곡 트레킹은 6월 말부터 8월 초순까지가 적기이다. 5월에도 계곡 트레킹을 즐기는 마니아가 있지만 수온이 차다. 한여름 주말이면 아침가리 계곡에 1천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 길은 인제군 기린면 조경동 다리에서 같은 면 조침령로 진동1리 마을회관까지 이어지며, 거리는 6.2㎞이다. '조경동'이란 '아침가리'의 한자 말이다. 조경동 다리까지 가려면 방동 약수에서 시작해 백두대간 트레일 방동 안내소까지 2.0㎞를 걸어 올라간 뒤, 안내소에서 조경동 다리까지 다시 3.2㎞를 걸어 내려가야 한다.
약 5㎞의 산길을 걸은 뒤에야 계곡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안내소는 해발 약 800m인 방동 고개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방동 고개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탐방객도 있지만 대개는 방동 약수에서부터 걸어 올라간다. 산길 트레킹과 계곡 트레킹을 합하면 약 11.4㎞를 걷는 셈이다.



물길을 걷는 계곡 트레킹은 일반 육로 트레킹과 다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계곡 바닥에 이끼가 끼어 있거나 돌이 많을 때는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어 물을 건널 때는 여유를 갖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물이 빠질 수 있게 디자인된 물놀이용 신발보다 발목을 잡아주는 등산화를 권하고 싶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등산지팡이를 사용하고, 허리 위로 차오르는 물길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침가리는 유순한 골짜기지만 뚝발소 등 수심 5m 이상의 깊은 소가 군데군데 있고 물살이 거센 곳이 산재해 있어 호기를 부려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길을 안내한 백두대간 트레일 인제 안내센터의 제갈형수 사무국장은 "계곡 트레킹은 무엇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비 온 직후나 비가 올 때는 계곡의 수량에 유의하고, 무엇보다 방동 안내소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오지 중의 오지…삼둔사가리

인제군과 홍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방태산은 북쪽의 설악산과 점봉산, 남쪽의 개인산 사이에 있는 명산이다. 사방으로 긴 능선과 깊은 골짜기가 뻗어 있고, 한국에서 가장 큰 자연림이라고 할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하다. 큰 산이어서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으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삼둔사가리는 방태산 자락에 숨어 있는 산골 마을들, 즉 오지 중의 오지를 일컫는다. 삼둔은 산속의 평평한 둔덕 3개라는 뜻으로, 홍천 쪽 내린천을 따라 있는 살둔, 월둔, 달둔을 말한다. 사가리는 인제 쪽 방태천 계곡 옆에 위치한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를 가리킨다. 이중 아침가리는 아침에 잠시 밭을 갈 정도로 해가 잠깐 비쳤다가 져버리는 첩첩산중을 이른다.
조선 중·후기에 널리 퍼졌던, 나라의 운명에 관한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삼둔사가리는 3재(물, 불, 전쟁)를 피해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언급됐다. 삼둔사가리 주민들은 한국전쟁 때 전쟁이 난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방태산 인근에는 6·25 동란 때 아침가리로 피난한 경험을 전하는 토박이 주민들이 아직 있다.
한반도 최고 청정 지역으로 통하는 아침가리 계곡에는 천연기념물인 열목어를 비롯해 쉬리, 수달, 도롱뇽 등 1급수 어종과 희귀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 방동 약수와 약수 숲길

방동 약수는 '한국의 명수'로 통하는 신비의 물이다. 탄산, 망간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톡 쏘는 맛이 강하다. 조선 시대 심마니가 이곳에서 산삼을 캐냈는데, 산삼 캐낸 자리에서 약수가 솟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약수터 옆에는 수령 300여 년의 엄나무가 있다. 한약재로 쓰이는 엄나무로 인해 약수의 효험이 더 크다는 믿음이 전래한다.



방동 약수터는 아침가리 계곡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지만 백두대간 트레일 6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계곡 탐방객과 등산객이 방동 약수에서 목을 축이고 길을 떠난다. 약수터 옆에 있는 작은 계단식 계곡의 운치도 만만치 않다.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방태산과 개인산 일대에는 방동 약수 외에도 개인 약수, 명지가리 약수가 있다. 개인 약수는 201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탄산과 철분 함량이 높아 비릿한 맛과 쏘는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방태산과 개인산 둘레에는 약수 숲길과 백두대간 트레일이 조성돼 있고, 이 길들은 세 약수를 잇는다. 4개 구간으로 구성된 약수 숲길 중 1구간은 방동약수로, 3구간과 4구간은 개인약수로 연결되며 백두대간 트레일 6구간은 명지가리 약수를 지난다.




◇ 백두대간 트레일

한국은 산악 강국으로 통한다. 전체 인구 중 등산 인구 비율이 세계적으로 높은 등 등산 문화가 대중화돼 있고, 국민의 산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 산은 지구 위 어디에나 있고 세계 곳곳에 높은 산, 명산이 있지만 사람에게 가까이 있고, 그다지 험하지 않은 게 한국 산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한국에서 산은 언제든 찾아가 쉴 수 있고, 자연과 사람이 소통하는 무대이다.



백두대간 종주는 산꾼의 '로망'이다. 백두대간 주요 등산로에 산악 인구가 집중되는 배경이다. 특정 등산로에 집중되는 이용 압력을 분산하고 능선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백두대간을 즐길 수 있도록 대간 동·서쪽 낮은 지대에 개발된 길이 백두대간 트레일이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후리에서 시작해 인제군 일대를 거쳐 홍천군 내면 불발령까지 10개 구간, 154㎞가 조성돼 있다. 백두대간 트레일을 걷다 보면 발길, 눈길 닿은 산줄기, 물줄기 하나하나가 그림 같은 풍광은 선사하지만, 1구간과 6구간은 특히 경치가 빼어나 탐방 예약제로 운영된다.
6구간 아침가리∼광원리 길은 방동 약수에서 홍천군 내면 원당 초등학교까지 22.5㎞이다. 이 길은 아침가리 계곡 상류를 따라 나 있으며 삼둔과 사가리 일대를 지난다. 걷는 동안 계곡과 숲을 번갈아가며 감상할 수 있었다. 숲길 입구에 조림된 자작나무 군락이 싱그러웠다. 이 구간에서 계곡 트레킹은 하지 않는다. 지형이 계곡 트레킹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림생태계의 보고인 백두대간을 보존하고, 탐방 활성화를 통한 대간 주변의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획된 백두대간 트레일은 남쪽으로 지리산까지 총 2,165㎞로 조성될 예정이다. 현재는 홍천에서 조성 작업이 멈춰 서 있다. 완성된 트레일의 장대한 규모를 상상해본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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