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6·25전쟁 상처 극복하고 도약하는 철원읍
작성일 2023-10-28 09:31:55 | 조회 38
[굽이굽이 별천지] 6·25전쟁 상처 극복하고 도약하는 철원읍
금학산 자락 옛 번화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노천 박물관
폐허 딛고 곡창 지대로 변모한 대마리, 정원마을로 부활한 화지리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철원=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일제 강점기 경기도 의정부와 인구가 비슷할 정도로 번창했던 이곳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됐다.
금강산과 서울 용산을 오가던 역이 있었고,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는 작가 상허 이태준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철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학이 내려앉은 모양과 같다고 해 이름 붙여진 금학산(해발 947m) 자락 철원읍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상흔 및 교훈을 되돌아볼 수 있는 노천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 한때 강원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마을, 이젠 문화재로 남아
1930년대 철원뿐 아니라 강원 도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옛 철원읍은 6·25전쟁으로 초토화됐다.
철원읍 관전리 옛 북한노동당 철원 당사(국가등록문화재 제22호)는 그 전쟁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철원은 38선 이북에 있다 보니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군과 북한이 통치하는 지역이 됐다.
3천여㎡ 부지에 3층 규모로 지은 건물은 총탄 흔적 등이 역력하다.

주민들이 구철원으로 부르는 옛 철원읍은 노동당사 일대다.
노동당사 인근에는 전쟁 중에 파괴돼 기초만 남은 옛 철원 감리교회(국가등록문화재 제23호)가 있다.
민간인 출입 통제선 검문소를 통과하면 1945년 해방 당시 학생 수가 2천600명이나 됐던 철원공립보통학교 자리가 나오는데 지금은 갈대와 나무만 가득하다.
이어 옛 철원군 농산물검사소(국가등록문화재 제25호), 철원 얼음창고(국가등록문화재 제24호)가 도로변으로 보인다.
철원에는 국가등록문화재가 5개 있는데 이 중 4개가 철원읍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번창했던 당시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던 경원선의 중간 지점에 있던 철원역은 기차가 다시 들어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 밖에도 옛 철원 제2금융조합, 옛 수도국 저수탱크 등이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 노동당사 맞은 편에는 철원읍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섰다.
226억원을 투입해 7만1천226㎡ 부지에 조성한 철원역사문화공원에는 1930년대 금강산 관광의 시작점이었던 철원역, 극장, 교회, 은행, 서점, 양장점 등 21개 건물을 재현해놨다.


◇ '한 손에는 총, 다른 손에는 삽'…황무지를 곡창지대로
철원읍 대마리는 6·25전쟁 당시 10일 동안 주인이 24차례나 바뀔 정도로 격전이 펼쳐졌던 백마고지 인근에 있다.
전쟁 후 황무지로 방치됐던 대마리 개척의 역사는 1967년 4월 5일 150명이 처음 입주하면서 시작됐다. 가족들이 들어온 것은 이듬해 8월 30일이다.
정부는 전쟁 직후 부족한 식량을 생산하고 국방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제대한 군인 150명과 가족을 입주시켰다.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방임에도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철책선이 없었다.
입주민들은 민간인이었지만 유사시 전투에 대비해 며칠 동안 군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마리의 모델은 이스라엘의 키부츠였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마을을 지키던 이스라엘의 자립촌을 모델로 선택한 것은 그 당시 취약했던 휴전선 상황과 쌀이 부족했던 우리나라의 처지를 대변한다.
화전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고되고 위험했다.
잡목과 갈대가 우거진 숲에 불을 붙이면 지뢰와 불발탄이 사방에서 터지는 바람에 숨어서 피해 있어야 할 정도였다.
밤에는 남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며 교전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간 과정에서 지뢰가 폭발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지뢰가 터지면서 숨진 사람의 시신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에 흩어졌다.
불과 1시간 전까지 같이 일하던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도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고, 작업 환경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입주 당시 개간을 하다 지뢰 등 폭발 사고로 숨지거나 다쳐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목숨 걸고 개척한 대마리는 전국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쌀 생산지로 변했다.

주민들은 아직도 가족과 함께 입주했던 날인 매년 8월 30일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마을 '리훈'인 '자력갱생'(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러 개척했다)이 적힌 현수막 너머로는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1904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태어난 상허 이태준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남쪽에서는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북쪽에서는 숙청당함으로써 양쪽 문단으로부터 모두 배제됐다.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2004년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 세워진 문학비와 흉상은 오늘도 우리의 분단 공간을 바라보고 서 있다.



◇ 정원 마을로 부활한 '꽃의 땅' 화지리
철원읍 화지리는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최근 인구 감소로 쇠락하자 주민들이 마을에 꽃을 심으며 '꽃의 땅'(花地)으로 부활하고 있다.
노후도가 70%나 됐던 화지리는 2018년 도시재생뉴딜사업에 선정된 것을 계기로 마을 미관을 바꾸고자 높은 담장을 120㎝ 이하로 낮추며 정원 마을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밋밋했던 골목길은 이 마을 출신인 김선경 화가가 담장에 벽화를 그려 꽃담 거리를 조성했고, 주민들은 벽화 주변에 꽃을 심고 화분을 내놨다.

아름다워진 마을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나오자 지난해부터는 주민들이 자기 집 정원을 개방해 가드닝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지역 기관들도 '꽃땅 원정대'로 참여해 정원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협력한다.
주민들이 쉴만한 곳이 없던 마을에는 파출소 자리를 이용해 마을 카페, 식당, 화원을 조성했다.
여기서 나오는 매출액의 30%는 마을에 환원해 심어 놓은 꽃 등을 관리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화지리는 도시재생사업이 장차 종료되는 것에 대비해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어 사후 관리를 이어갈 계획이다.
화지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장현지 팀장은 "담장이 낮아져 집 안이 보이니 주민 스스로 마당에 꽃을 심는다"며 "고령화가 심각하고 사람이 없던 마을이 예뻐지다 보니 요즘에는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고 말했다.
905년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도선국사는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300년 동안 통치할 것이요, 만일 금학산이 아닌 곳으로 정하면 국운이 30년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철원에는 전해진다.
궁예는 현재 철원평야 북쪽 북한 땅인 고암산 아래에 궁궐을 지었고, 18년 만에 멸망했다.
지금 금학산 자락 철원읍은 전쟁의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번창할 꿈을 꾸고 있다.

dm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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